십이월 초오일
유세차(維歲次)라는 말의 뜻
禮六 君子愼始 差若毫釐 謬以千里─《周易》
군자는 비롯함이 신중하나니 차이가 터럭같이 미세해도 어긋나면 천리가 된다.
問 : 여러 제사의 축문(祝文)에서 첫머리에 쓰는 유세차(維歲次)라는 말은 무슨 뜻이며 거기에 연호(年
號)는 써넣어야 되는가요? 또 월건(月建)은 어떻게 추출(抽出)해내며 어째서 토정비결(土亭秘訣) 등을
볼 때에 따지는 월건과 축문에서 쓰는 월건이 다른가요? ─窮問子
答 : 먼저 유세차의 維는 의미를 갖지 않는 발어사(發語 辭) 입니다. 심각하거나 중대한 말을 꺼내면서
목청을 가다듬는 소리 정도겠지요. 그래서 이를 순수한 우리말로 풀어 옮기면 아아, 저어 쯤 되거나 아
뢰옵건대 또는 말씀드리건대 같은 소리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歲次는 세월의 순서 또는 세년(歲年)의 차서(次序)입니다. 그러니 유세차를 우리말로 풀어 이르면 아
아, 세월의 순서로 아뢰옵건대 정도가 되겠습니다.
다음에 연호는 반드시 들어가야 합니다. 옛적에는 연호가 빠진 축문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었고 고의로
연호, 즉정삭(正朔)을 뺀 축문을 썼다간 역(逆)으로 몰려 큰 화를 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연호든
이 연호를 쓰지 않는 것은 역법(曆法) 자체가 없는 미개인에게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축
문에서 어느덧 연호가 빠져 사라지게 된 내력을 알아보면 거기에 민족의 슬픈 망국한(亡國恨)이 서려
있습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되의 추장 출신인 청태종(淸太宗)에게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 서 내려와 삼
전도(三田渡)에서 고두배(叩頭拜)를 한 치욕에 떨던 선조들은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습니다. 국가 공
문서에서는 청의 정삭을 쓰지 않았다가는 당장 또 쳐들어올 것이므로 순치(順治)니 강희(康熙)니 하는
청제(淸帝)의 연호를 썼으나 저들이 알길 없는 사가(私家)의 문세에서는 명(明)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
(毅宗) 의 숭정(崇禎) 연호를 그대로 써서 그 연호가 17년으로 끝난 뒤에도 굳이 숭정 기원후(紀元後)
몇 주갑(周甲 : 60년 주기) 무슨 년이라고 표기하는가 하면 민간에서는 아예 이처럼 환산하기 어려운
연호를 빼버리고 그저 세차의 간지(干支)만을 쓰게 되었습니다.
무한으로 반복되는 햇수를 세는 단위가 60갑자로 줄어든 셈이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축문을 읽을 때
유우… 하고 발어사를 한 다음 잠시 연호를 말할 동안을 침묵했다가 세차로 나가다가 그마저 유세차로
붙여 말하게 된 것이 오늘의 형태입니다.
그렇게 수백 년을 내려오다가 1896년에 고종(高宗)이 대 군주폐하(大君主陛下)가 되면서 건양(建陽)의
연호를 선포하고 이듬해에는 황제로 즉위하여 광무(光武)의 연호로 바꾸니 우리에게도 공사문서 간에 떳떳이 쓸 수 있는 연호가 생겼습니다.
그래도 이 연호에 익숙지 못한 민간에서는 여전히 유세차 유세차를 남발했지요. 그러던 대한제국(大
韓帝國)의 연호도 광무 10년에다 융희(隆熙) 4년까지 14년의 단명으로 끝나고 나라가 일본에 합병되
면서 명치(明治) 와 대정(大正) 등의 일본연호가 들어와 공용화 되었습니다. 이것을 민간에서 왜기(倭
紀)라고 쓴 기록도 있는데 이를테면 왜놈의 기원이란 뜻이니 청의 연호가 되놈의 기원? 으로 비하되던
것과 같은 이유로 배척 내지 기피되었지요.
어쨌거나 그래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경건한 축문에서는 이따위 연호를 다입에 올리지 않은 것입
니다.
그밖에 조선조 창업 이후를 통산하는 개국(開國)과 상해(上海) 임시정부에서 만든 민국(民國)등의 연호
가 있었으나 일반화되지 못했고 1945년 해방 이후에는 단기(檀 紀)와 서기(西紀)가 공사간에 써야 마
땅한 연호로서 엄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조상에게 공경으로 아뢸 때에야 반드시 이두 연호중 하나를 써야겠지요. 그러나 유세차가 하
도 인이 박혀서인지 유 다음에 연호를 넣었다간 선대에서 쓰지 않았고 예문(禮文)에 없는 짓을 한다고
호령하며 꾸짖는 노인이 비일비재입니다. 노인이라고 다 유식한 것은 아닌 때문이지요.
지난 가을에도 서울사직단(社稷壇)에서 봉행(奉行)하는 대제(大祭)에 가 보았더니 축문이 역시 유세차
이더군요. 국가 예산을 들여 옛적 나라의 기틀이던 사직단을 복원하여 놓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비
는 대제를 올리면서 대한민국의 국정 연호인 단기를 일컫지 않고 빼놓는다는 것은 무슨 논리이겠습니
까. 지금 우리나라에서 단군(檀君)이 나라를 연 날이 개천절(開天節)로 기려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경전(經傳)을 보면 성현이 이런 일을 가소(可笑)롭다 표현한 바 있습니다. 개천절이 실은 음력으로 10
월 3일인데 양력 10월 3일로 우긴 일이 잘된 일이 아닌 것처럼 이 일도 잘하는 짓이 아닙니다. 참고로
유세차 의 축식 첫머리에 단기 연호를 넣어 이른다면 유단군기원사천삼백삼십일년세차무인(維檀君紀
元四千三 百三十一年歲次戊寅…)이 되겠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졌는데 월건법(月建法)에 관해 답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주(四柱)라는 것은 해의 이름인 태세(太歲)와 달의 월건, 날짜의 일진(日辰), 시
각의 시지(時支)를 네 개의 기둥이라 하여 이름한 것입니다. 그 이름을 모두 10개의 천간(天干)과 12개
의 지지(地支)를 순렬(順列)로 늘어놓아 짝짓게 한 60개의 간지(干支)로 하나씩 붙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지의 첫이름은 천간의 첫자 인 갑(甲)과 지지의 첫자인 자(子)가 짝지은 甲子이고 만세력(萬
歲曆)이 처음 출발하는 사주는 甲子年 甲子月 甲子日 甲子時이고 여기에서 갑자년이 태세이고 갑자월
이 월건이며 갑자일이 일진이고 갑자시가 시지인 것입니다. 제사에서는 그 시각까지는 아뢰지 않게 되
어 있으므로 축문에 쓰는 것은 이사성(四星) 가운데 일진까지입니다.
10干과 12支가 한 바퀴 돌며 서로 짝을 지으면 60개의 간지가 나오는데 이를 달리 60갑자(甲子) 또는 六甲이라 합니다. 옛사람들이 한평생을 살려면 기본으로이 육갑을 암기해야 하므로 요즘 아이들이 구
구단을 외우듯 열 손가락을 꼽으며 육갑을 익히다 보니 이를 자주 틀리는 지능을 일컬어 병신 육갑한다
는 속된 말도 생겼습니다.
역법(曆法)이 오래 시행되고 요즘의 달력인 시헌력(時憲曆)이 보급되면서 거기에 태세와 일진은 잘 적
혀 나왔는데 어째서인지 만세력 또는 천세력(千歲曆)에 있는 것과 같은 월건은 표기되어 나오지 않다
보니 달력만 보아서는 여간 해서 월건을 알아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사주(唐四柱)나 토정
비결 등을 보려면 반드시 천세력을 펴놓게 된 것입니다.
축식(祝式)에서 해는 태세로 일컫고 날짜도 일진으로 하는데 달만은 무슨 삭(朔)이라 하여 초하루 朔자
를 씁니다. 여기서 일컫는 삭은 초하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해에 이어 달을 말하는 것이니 월건을 찾
아 써야 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해와 날짜를 태세와 일진으로 하니 달도 월건으로 함이 옳고 원래는 그
렇게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모를 만큼 오래도록 이 달의 이름은 월건으로 하지 않고 그 달 초하루의 일진을
넣어 갑자삭(甲子朔) 을축삭(乙丑朔)으로 하여 이를테면 갑자일이 초하루인 달 정도로 풀이가 되게 써
왔으니 이를 이루 다 고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민간에서 식자가 아니면 천세력을 볼 줄도 모르는 터
수에 매번 월건을 찾아낸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왕조실록을 보아도 매월 초하루에만은 일진에다 朔자를 붙였습니다. 또 이 朔은 천자가 제후(諸侯)에
게 주는 달력의 뜻을 가지고 있어 자의(字意)가 무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정삭(正朔)을 받는 것은 어떤
후왕(侯王)이 그 황제의 통치를 받는 일이 됩니다. 연말에 천자가 이듬해 12개월의 달력에 정령(政令)
을 적어 내리면 제후는 이를 종묘(宗廟)에 보관하고 매월 초하루에 양(羊)을 희생(犧牲)으로 하여 고한
다음 그 달의 달력과 거기에 적힌바 에 따라 정사를 폈습니다.
이처럼 삭이 중시되다 보니 달의 이름도 월건을 제치고 갑자월이나 을축월이 아닌 갑자삭이나 을축삭
이 되어 본디의달 이름이 아닌 초하루의 일진을 붙여 일컫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또는 본디
의 월건을 찾기가 어려우니 편법으로 이른바 초하루朔을 쓰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모든
축식의 월건은 그 달 초하루의 일진에 삭을 붙여 씁니다. 이를 굳이 본디의 월건으로 아뢰고자 하여 어
느 집에나 손닿는 데에 있을 리 없는 천세력을 구해다 해독법을 익히느라 애쓸 것까지는 없을 것 같습
니다. ─ 弼雲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