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처한 시대적, 지리적 관점에 따라 주변을 바라보는 시각들이 많이 바뀌게 되는데, 세계사를 공부할 때에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한 사람은 "콜럼부스"라 배웠죠. 하지만 토착 원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아메리카대륙은 누구에 의해 발견된 것이 아니고 원래 그곳에 있었고, 또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땅이기에 "발견" 했다는 표현을 쓰기엔 억지가 아닐까요?
하지만 근세에 이르러 세계사를 정립함에 있어 유럽의 사고에 의해 정립 되어지다 보니 아메리카대륙은 "콜럼부스"가 발견한 땅이 되어 버렸답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세계지도를 펴놓고 대륙을 나누다보니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도 극동아시아라는 지역에 포함되게 되었는데, 요즈음 우리나라 일부학자들이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보면 우리는 극동이 아니라 아시아의 중앙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러한 관점에서 글을 올릴까 합니다.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에 가면 남북국 시대 신라에서 쌓아 놓은 석탑이 하나있는데, 정식 명칭은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으로 일명 "중앙탑"이라고 합니다. 이 탑은 신라 원성왕 때 쌓은 것으로 사찰 터도 아닌 이곳에 탑을 쌓은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지배한 영토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네요. 이곳이 신라 5경중에 중앙에 위치한다고 중원경이라고 불리웠으니 대략 당시에는 중앙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탑은 국보 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화강암으로 14.5m 정도의 높이로 만들어진 현존하는 신라의 석탑 중 최고라고들 합니다. 기단은 각부를 여러개의 석재로 쌓았으며 상·하층 기단 모두 면석에 탱주를 4개씩을 세웠 놓았고, 탑신부도 각부를 여러개의 석재로 만들었답니다. 1917년 이 탑을 보수할 때 6층 옥신과 기단 밑에서 사리 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특이한 것은 신라시대 사리병, 칠합 외에도 고려시대 양식의 청동 거울이 발견되어진 점으로 이 탑에다 고려시대에 다시 사리를 납치(納置)한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중앙탑은 신라시대 석탑형식에서 많이 생략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탑두부에는 복발(覆鉢)과 앙화(仰花)만 있을 뿐 보주(寶柱) 용차(龍車) 등이 없으며, 전체적인 모습이 높이와 폭의 비례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 약간은 어색한 형태이긴 하지만 향토사료 전시관, 수석전시관과 더불어 넓은 잔디밭으로 공원화 되어진 주변환경이 중앙탑 옆으로 흐르는 남한강물과 더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곳이랍니다. 특히 "은빛 물안개"가 자욱한 오전에는 더욱더 좋은데, 충주에서 유명한 탄금대를 지나 520번 지방도로를 따라 강변을 달리다 보면 우측 강변에 우뚝 솟은 탑을 볼 수 있답니다.
예전에는 남한강변이 수석애호가들에게 무척이나 인기를 얻었었는데, 특히 지금은 수몰된 제천시 청풍면 소재 황석나루터(다리가 없어서 도선에 시내버스를 싣고 강을 건너가던 나루) 부근이 질 좋은 수석들이 가득하여 항상 탐석가들의 발길이 끊어지질 않았었답니다. 하여간 중앙탑 옆에 있는 수석전시관도 한번 들러 보시면 좋겠네요.
더불어 이 중앙탑에서 조금만 더가면 "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도 볼 수 있답니다. 이 비석은 장수왕때인 423년에 세워진 것으로 광개토왕비와 마찬가지로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비면으로 사용한 것으로 마모가 심해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고 대략 400여자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남한 내에 존재하는 몇 안되는 고구려 금석문으로서 그 가치가 아주 크다네요.
그리고 중앙탑과 중원 고구려비가 있는 이곳은 고구려입장에서 보면 변방이 되겠죠. 만약 고구려가 통일을 하고 나라 중앙에 탑을 세웠다면 어디쯤 될까요? 한번 지도를 놓고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근세에 이르러 세계사를 정립함에 있어 유럽의 사고에 의해 정립 되어지다 보니 아메리카대륙은 "콜럼부스"가 발견한 땅이 되어 버렸답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세계지도를 펴놓고 대륙을 나누다보니 우리나라는 아시아에서도 극동아시아라는 지역에 포함되게 되었는데, 요즈음 우리나라 일부학자들이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보면 우리는 극동이 아니라 아시아의 중앙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러한 관점에서 글을 올릴까 합니다.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에 가면 남북국 시대 신라에서 쌓아 놓은 석탑이 하나있는데, 정식 명칭은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으로 일명 "중앙탑"이라고 합니다. 이 탑은 신라 원성왕 때 쌓은 것으로 사찰 터도 아닌 이곳에 탑을 쌓은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지배한 영토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네요. 이곳이 신라 5경중에 중앙에 위치한다고 중원경이라고 불리웠으니 대략 당시에는 중앙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탑은 국보 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화강암으로 14.5m 정도의 높이로 만들어진 현존하는 신라의 석탑 중 최고라고들 합니다. 기단은 각부를 여러개의 석재로 쌓았으며 상·하층 기단 모두 면석에 탱주를 4개씩을 세웠 놓았고, 탑신부도 각부를 여러개의 석재로 만들었답니다. 1917년 이 탑을 보수할 때 6층 옥신과 기단 밑에서 사리 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특이한 것은 신라시대 사리병, 칠합 외에도 고려시대 양식의 청동 거울이 발견되어진 점으로 이 탑에다 고려시대에 다시 사리를 납치(納置)한 것으로 추측을 하고 있답니다.
그런데 중앙탑은 신라시대 석탑형식에서 많이 생략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탑두부에는 복발(覆鉢)과 앙화(仰花)만 있을 뿐 보주(寶柱) 용차(龍車) 등이 없으며, 전체적인 모습이 높이와 폭의 비례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 약간은 어색한 형태이긴 하지만 향토사료 전시관, 수석전시관과 더불어 넓은 잔디밭으로 공원화 되어진 주변환경이 중앙탑 옆으로 흐르는 남한강물과 더불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곳이랍니다. 특히 "은빛 물안개"가 자욱한 오전에는 더욱더 좋은데, 충주에서 유명한 탄금대를 지나 520번 지방도로를 따라 강변을 달리다 보면 우측 강변에 우뚝 솟은 탑을 볼 수 있답니다.
예전에는 남한강변이 수석애호가들에게 무척이나 인기를 얻었었는데, 특히 지금은 수몰된 제천시 청풍면 소재 황석나루터(다리가 없어서 도선에 시내버스를 싣고 강을 건너가던 나루) 부근이 질 좋은 수석들이 가득하여 항상 탐석가들의 발길이 끊어지질 않았었답니다. 하여간 중앙탑 옆에 있는 수석전시관도 한번 들러 보시면 좋겠네요.
더불어 이 중앙탑에서 조금만 더가면 "중원 고구려비"(국보 205호,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도 볼 수 있답니다. 이 비석은 장수왕때인 423년에 세워진 것으로 광개토왕비와 마찬가지로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비면으로 사용한 것으로 마모가 심해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고 대략 400여자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며 남한 내에 존재하는 몇 안되는 고구려 금석문으로서 그 가치가 아주 크다네요.
그리고 중앙탑과 중원 고구려비가 있는 이곳은 고구려입장에서 보면 변방이 되겠죠. 만약 고구려가 통일을 하고 나라 중앙에 탑을 세웠다면 어디쯤 될까요? 한번 지도를 놓고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출처 : 김도균의 아하! 이런 것이었구나.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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